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2대 효공왕의 능인 "효공왕릉(孝恭王陵)"입니다.

 

경주 효공왕릉(慶州 孝恭王陵)은 사적 제183호로 지정 되었으며,

무덤의 지름은 21.2m이고 높이는 5m의 규모로,

 

 

 

 

효공왕(孝恭王)의 성은 김씨, 이름은 요(嶢)이며,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로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이고,

897년에 왕이 되어 912년에 승하 하였으며,

15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기우는 국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후백제의 견훤과 후고구려의 궁예의 공략에 국토를 빼앗겼습니다.

 

 

 

 

죽은 뒤 삼국사기(三國史記) 에서는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三國遺事) 에서는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구지제(仇知堤)"의 동산 옆에 묻었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현재의 위치가 사자사터로 전하는 지점의 북쪽에 해당하므로,

크게 어긋나지 않는것으로 보고 있으며,

 

 

 

 

무덤 앞에는 상석조차 없으며,

"사적 제183호 신라 효공왕릉" 이라는 표지석만 서 있고,

 

 

 

 

능은 원형 토분(土墳)으로 봉토(封土) 밑에 드문드문 자연석이 보이는데,

이는 무열왕릉(武烈王陵)에서와 같은 성격의 둘레돌인 호석(護石)의 일부로 추측되며,

그 밖에는 아무런 표식물(表飾物)이 없이 평범하기만 합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한 3, 4개의 호석(護石)이 보이고 있어,

원래는 밑둘레를 따라 자체적으로 보호 석렬(石列)을 마련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 민묘보다 규모가 조금 크게 보이는 외에 아무런 장식물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으로,

이 무덤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사자사의 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라후기의 왕으로 재위 기간 동안에는,

천첩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궁예에게 30여 개의 성을 빼앗겼으며,

견훤에게 남쪽의 10개 성을 빼앗기는 등 신라의 영토는 축소되고,

신라 왕실의 권위 또한 추락하게 만든 효공왕(孝恭王)의 무덤인,

경주의 왕릉인 "효공왕릉(孝恭王陵)"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