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에 있는,

신라 제4대왕인 탈해이사금(재위 57∼80)의 능인 "경주 탈해왕릉 (慶州 脫解王陵)" 입니다.

 

"경주 탈해왕릉 (慶州 脫解王陵)"은 사적 제174호로 지정 되었으며,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방에 있는 표암 근처에 있는 원형토분으로,

 

 

 

 

표암과 거의 같은 구역에 자리하고 있는 탈해왕릉의 위치를 미리 보아 둡니다.

 

 

 

 

탈해왕의 성은 석씨(昔氏)이고 이름은 탈해(脫解, 혹은 吐解)라고도 하며,

제3대 유리왕(유리이사금)의 유언으로 왕위에 올라 62세에 왕이 되었는데,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으로 재위 23년간 왜구(倭寇)와는 친교하고 백제와는 자주 다투었으며,

계림(鷄林)을 국호로 하였으며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서기 57년에 왕이 되어 80년에 승하 하였고,

죽은 뒤 경주에 있는 양정(壤井)의 언덕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능의 동편에는 사당인 숭신전(崇信展)이 있어,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는 들어가보지 못하고,

 

 

 

 

숭신전(崇信展)은 신라 제 4대왕이며 경주 석씨의 시조인 석탈해왕을 기리고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석씨는 신라초기에 8 왕이 재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석씨 왕 중에 유일하게 왕릉이 전해지고 있는곳은 이곳 뿐인데,

가장 큰 이유는 석씨는 시조 탈해 이사금을 제외하고는 사서에 장지 관련기록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왕릉의 외부 모습은 원형봉토분으로,

밑지름은 14.3m이고 높이는 4.5m인데 비교적 작은 형태의 무덤에 속하며,

왕릉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과 표식물이 없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무덤으로,

이 무덤은 1974년 12월 31일에 도굴 당했는데,

내부는 굴식돌방무덤인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었음이 밝혀 졌으며,

능 앞에 마련된 잘 다듬은 돌은 후대에 설치한 혼유석(魂遊石)이며,

 

 

 

 

탈해왕(脫解王)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는데,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 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완하국,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는데,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진포에 닿았고,

그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 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았으며,

석탈해는 62세 때 왕위에 올랐고,

왕이 세상을 떠나자 삼국사기에는 "성북의 양정 언덕에 장사하였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수장하였다가 뼈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동악(東岳)에 모셨는데,

지금의 동악 대신(大神)이다."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성북이라고 한 점이 현재의 위치와 부합하고 있습니다.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난생설화와 궤짝으로 표현되는 신화적인 표현으로,

북방족 또는 이민족이 하반도에 들어와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유추할수 있게해주는 곳으로,

"경주 탈해왕릉 (慶州 脫解王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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