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의 능묘인,

"경주 오릉(慶州 五陵)"입니다.

 

경주 오릉(慶州 五陵)은 사적 제172호로 지정 되었으며,

 

 

 

 

오릉(五陵)의 입장료는 유로인데 위의 요금표를 참고 하시면 됩니다.

 

 

 

 

오릉(五陵)으로 들어가기전 안내문에 있는 평면도를 보고,

대략의 위치를 미리보아 둡니다.

 

 

 

 

매표소를 들어서면 오릉(五陵)을 먼저보기 위해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는 송림을 만나기도 하며,

 

 

 

산책하듯 숲길을 걷다보면 능들의 모습이 들어와,

 

 

 

 

오릉(五陵)은 지정면적이 8만 9,950㎡이며,

삼국사기 등의 문헌 에서는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며,

모두 5기가 있으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閼英)의 능과,

제2대 남해차차웅, 제3대 유리이사금, 제5대 파사 이사금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어,

신라초기 박씨왕 네 명과 왕비 한 명을 한 자리에 모셨다고 하여 오릉이라 하며,

 

 

 

 

능은 원형봉토분으로 제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크며,

제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고,

제3릉은 제2릉의 동쪽에 표주박 형태인 표형(瓢形)를 이루고 있으며 높이는 약 7.2m의 규모이며,

제4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고,

제5릉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로 가장 작은 규모 입니다.

 

 

 

 

오릉 앞에 있는 내삼문인 숭의문을 들어서면,

 

 

 

 

지은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제각의 건물이 있어,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큰 규모의 건물이며,

 

 

 

 

숭의문에서 제각으로 들어가는 길은,

삼도가 깔려있어 마치 조선시대의 왕능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오릉(五陵)은 남산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경주 분지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네 분의 왕을 담엄사 북쪽 사릉원 내에 장례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왕이 승하 후 7일 만에 승천한 후,

유체가 다섯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져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였기에 그대로 다섯 군데에 매장하였다 하여 일명 "사릉(蛇陵)"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며,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신라 제1대 왕이자 박씨의 시조로 칭호는 거서간이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 모양의 알에서 태어나 "박(朴)"이라는 성을 붙였으며,

혁거세는 이름이 아닌 존호로 "밝은 세상"이라는 뜻으로 일명 "불구내"라고도 하며,

나라이름은 서라벌이라 하고 알영을 왕비로 맞아 들였는데,

즉위 후 왕비와 함께 6부를 돌며 농사와 양잠을 장려했고 서울을 금성으로 정하고 성을 쌓았으며,

죽은 뒤 담암사 북쪽의 사릉에 묻혔습니다.

 

 

 

 

능의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고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인데,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릉(五陵)을 따라 나있는 길을 걷다보면,

 

 

 

 

담장을 두른 협문이 있어,

 

 

 

 

협문을 밀고 들어서니 아담한 규모의 비각이 있어,

 

 

 

 

옆에는 우물이 보이고 비각에는 비석이 있는데,

 

 

 

 

비각의 내부에는,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라는 명문이 새겨진 비석이 있고,

 

 

 

 

비각을 나오면 장방형의 연못이 있어,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이 떠있는 형태의 방지원도는 하늘은 둥굴고 땅은 모났다는 도교사상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의미는,

"하늘의 덕성은 원만하고 땅의 덕성은 방정하다는 뜻"이며,

그뿌리는 삼한시대 이전으로 5,000년이 넘는 뿌리를 가지고 있는 고유의 사상이며,

 

 

 

 

알영부인이 탄생한 알영정(閼英井)은,

박혁거세의 부인의 탄생설화가 있는 우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이 광경을 본 어떤 할머니가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으며,

우물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알영은 자라면서 빼어난 용모와 덕행을 갖추었는데 시조왕께서 소문을 듣고 왕비로 맞았으며,

알영왕비는 행실이 어질고 보필을 잘하여 사람들이 성인이라 불렀습니다.

 

 

 

 

알영정의 연못으로 들어오고 보니,

반대쪽인 뒷문으로 들어온것을 알게 되나,

이미 들어온것이니 어쩔수 없이 뒤쪽부터 보면서 나오게 됩니다.

 

 

 

 

앞쪽으로 나오니 사당으로 보이는 공간이 나오는데,

왼쪽의 숭덕전은 문이 닫혀있고,

 

 

 

 

알영정의 연못앞에는 단청을 하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건물의 왼쪽에 "추보헌(追報軒)"의 현판이 걸려 있어 용도는 관리사의 하나로 보이며,

 

 

 

 

문앞의 쪽마루에는 흰고무신이 가지런하게 방문앞 곳곳에 놓여 있어,

제례시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며 머무르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추보헌(追報軒)을 통하여 나오니,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祭殿)인 "숭덕전(崇德殿)"이 있어,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54호로 지정된 숭덕전은,

1429년(세종 11)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0년(선조 33)과 광해군 10년에 중건 하였고,

숙종 30년에 고쳐 지었으며 경종 3년 숭덕전이라 편액을 걸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영조 11년에 고친 것입니다.

 

 

 

 

숭덕전(崇德殿)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인 영숭문은 굳게 닫혀있으며,

입구의 왼쪽에는 팔각 뚜껑이 덮인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공덕비(功德碑)를 보호하는 작은 비각이 있어,

비각안의 공덕비는 임진왜란으로 숭덕전 건물들은 소실 되었으나,

시조왕의 위패를 선도산 성모사로 피신 시키므로서 화를 피하게 한 공로로 세워진,

"박언수 공"의 공덕비가 있으며,

 

 

 

 

공덕비의 뒤편의 들어오는 입구에는 비각인 숭성각(崇聖閣)이 있어,

 

 

 

 

숭성각은 비각인 건물과 담장을 두르고 있는 일각문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데,

 

 

 

 

비각인 숭성각(崇聖閣)에는,

박혁거세와 숭덕전의 내용을 기록한,

"신라 시조왕 신도비(新羅 始祖王 神道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과 왕비 알영"의 능과 함께,

신라 초기의 능들을 함께 돌아볼수 있으며,

알영부인의 탄생지인 알영정과 함께 신라시조의 제사공간인 숭덕전 일원을 함께 볼수 있으며,

난생설화(卵生說話)의 이야기를 살필수 있는곳으로,

경주의 유적인 "오릉(五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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