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정자인,

"강호정(江湖亭)"입니다.

 

영천 강호정(江湖亭)은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 되었으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자의 부속건물로 "고직사(庫直舍)"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

 

 

 

 

정자의 후면에 자리한 고직사는 정면 3칸에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구조로 자리해 있으며,

 

 

 

 

한칸에는 아담한 부엌을 들였고,

 

 

 

 

남은 2칸에는 온돌방를 들인 모습이며,

 

 

 

 

고직사(庫直舍)로 보이는 이곳은,

건물을 수호하고 관리하는 고지기가 있던 곳 으로 여겨 집니다.

 

 

 

 

고직사앞에 있는 일각문을 들어서면,

 

 

 

 

강호정(江湖亭)이 자리하고 있어,

강호정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였던 정세아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정자로,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의 자호천 언덕에 "자호 정사"라 이름 짓고,

선조 32년(1599)에 지은 후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며,

 

 

 

 

정자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양쪽에는 각 2칸의 방이 있고 가운데 1칸이 마루로 꾸며진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이며,

화려한 난간을 설치 하였고 정자 뒤에는 2채의 작은 부속건물이 있는데 그 마당을 통해 정자로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정자의 전면에는 "강호정(江湖亭)"의 현판이 있어,

익소의 주인인 호수 정세아의 자호(自號)를 따라 강호정(江湖亭)이라 이름 하였다고 하며,

 

 

 

 

자호정사(紫湖精舍)의 현판도 있어,

정세아가 처음 정자를 지었을때의 당호이며,

 

 

 

 

정자의 마루 위에는 강호정 원운(江湖亭原韻)을 비롯한,

많은 현액시(懸額詩)들을 볼수 있습니다.

 

 

 

 

정세아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영천·경주지방을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뒤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영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용산동에 이 정자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고 하며,

 

 

 

 

정세아(鄭世雅,1535~1612)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이며 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 하였고,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士族)으로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9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는데,

그 때 곽재우(郭再祐)는 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 하였으며,

 

 

 

 

그 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의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천뢰(鄭天賚)·조성(曺誠)·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고,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 하였기에,

이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 하였습니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 갔으며,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 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 하였습니다.

 

 

 

 

그후 정세아(鄭世雅)는 장현광(張顯光)과 조호익(曺好益), 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 하였으며,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호수실기"가 있으며 시호는 강의(剛義) 입니다.

 

 

 

 

영천댐의 수몰로 인해,

자신의 묘소 아래로 이건 하였기에,

정자의 옛 정취는 찾을수 없지만,

영천댐이 내려다 보이는곳에 자리하여 풍광은 뛰어 납니다.

 

 

 

 

강호정(江湖亭)에 걸린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의 시(詩)를 가져와 봅니다.

壯志期梟賊將頭 장렬한 뜻으로 적장의 목 벨 것을 기약하였더니

殘骸驚却邊秋 쇠잔해진 몸 도리어 귀밑털 센 것에 놀라노라

有纓未遂終軍請 밧줄이 있으나 한나라 종군(終軍)이 요청한 것처럼 뜻을 이루지 못하고

無力空懷杜老愁 힘없는 사람이 공연히 당나라 노두(老杜)처럼 시름을 품는도다

衰病豈宜馳世路 노쇠하고 병든 몸이 어찌 벼슬길에 달려가리요

退閒端合玩淸流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며맑게 흐르는 시냇물과 노님이 마땅하리

白鷗不厭江湖 백구도 강호의 늙은이 싫어하지 않나니

靑眼從今至死休 이제는 반가이 백구와 죽는 날까지 즐기리라

 

 

 

 

경북 영천으로의 문화재 탐방에서 찾은 정자로,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의 구국을 위한 충심과,

전공에 대한 포상도 멀리한채 후진양성에 힘썻던 그의 생을 돌아볼수 있는곳으로,

영천의 정자 문화재 "강호정(江湖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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