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하천재(夏泉齋)"와 내부에 있는 "부비각(附碑閣)"입니다.

 

영천의 "하천재(夏泉齋)"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 되었으며,

오천 정씨(烏川鄭氏) 집안의 묘와,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무덤가에 세운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지은 집과 비각이며,

 

 

 

 

하천재를 찾으면 삼휴정과 사의당 그리고 외회당과 오회공 종택과 강호정이 근접한 거리에 있어,

함께 돌아 볼만 합니다.

 

 

 

 

재사인 하천재(夏泉齋)는 인조 15년(1637)에 진주목사(晋州牧使) 정호인(鄭好仁)이 처음 지었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들은 후대에 중건(重建)된 것으로 보이며 영천댐 수몰지구로 편입되어,

1976년 7월에 현 위치로 이건 하였으며,

 

 

 

 

가정 먼저 보이는 건물의 외부에는 "하천재(夏泉齋)"의 현판이 있고,

 

 

 

 

마치 서원으로 들어선듯,

서원의 동재와 서재와 같이 3칸 규모의 건물이 마주하고 있어,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추천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참여하지 않고 강호정사(江湖精舍)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로,

그 공으로서 상을 바라지 않고 관직을 떠나 시골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은 덕망이 높은 선비 였으며,

 

 

 

 

이 묘재(墓齋)는 오천정씨(烏川鄭氏) 문중(門中)의 묘소(墓所)와,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신도비(神道碑)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주목사(晋州牧使) 정호인(鄭好仁)이 조선(朝鮮) 인조(仁祖) 15년(1637)에 창건 하였다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하천재의 중심건물인 "추원당(追遠堂)"이,

서원의 강당격으로 정면 4칸의 맞배지붕의 구조로 자리해 있어,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이며,

 

 

 

 

정면의 처마 아래에는 추원당(追遠堂)의 현판이 있으며,

 

 

 

 

하천재(夏泉齋)는 추원당(追遠堂)을 중심으로 하여,

전체적으로 튼 "口"자 의 형태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추원당 옆에는 노거수 향나무가 한그루 서있고,

 

 

 

 

추원당 뒤편으로는 계단위로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어,

 

 

 

 

"부비각(附碑閣)"으로 명명된 신도비각(神道碑閣)은,

1칸의 규모로 아담한 크기 이지만 겹처마의 구조여서 지붕은 더 커보이기도 합니다.

 

 

 

 

정세아(鄭世雅,1535~1612)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이며,

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하였으며,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士族)으로,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 9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는데,

그 때 곽재우(郭再祐)는 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 하였으며,

그 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천뢰(鄭天賚)·조성(曺誠)·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고,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 하였기에 그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 하였으며,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 갔습니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 하였으며,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 하였으며,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호수실기"가 있으며 시호는 강의(剛義)입니다.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큰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을 멀리하고 후학 양성에 힘썻던,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의 행적을 되돌아 볼수 있는곳으로,

영천의 재사 문화재인 "하천재(夏泉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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