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봉화읍 삼계리 석천계곡에 있는,
봉화 석천정사(石泉精舍)를 찾았습니다.
석천계곡에 있는 석천정사(石泉精舍)는,
청암정과 함께 명승 제60호로 지정 되었으며,
석천정사(石泉精舍)는 정자라 하기엔 큰 건물로,
전체 34칸의 규모로 학문과 수양을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정사(精舍)라 한 것 같으며,
서원에 가까운 규모로 되어 있으며,
정사(精舍)로 들어가기전,
배치도로 석천정사(石泉精舍) 건물의 위치를 살펴 봅니다.
석천정사(石泉精舍)는 1535년 충재 권벌의 큰아들 청암 권동보(權東輔:1517-1591)가,
초계군수로 근무하다가 향리에 돌아와 선지를 계승하여 건립한 별서로 삼은 정사(精舍)이며,
이곳에는 소나무 숲과 기암으로 이루어진 석천계곡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빼어난 자연경관에 전통의 사적이 잘 어우러져 있는 명승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서편의 입구가 막혀있어 동편의 협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학문수양과 강학의 기능인 석천정사(石泉精舍)의 평면은 "ㄴ자" 형의 편대칭 형식인데,
정면 5칸 반,측면2칸의 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6칸 대청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편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문과 담장을 연경되어 있는 2칸 규모의 아담 하면서,
정사 건물과 수직 방향으로 자세를 바꾸고 선 창고 건물인 일야각(一夜閣)이 있어,
일야각(一夜閣)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충재 선생의 신의를 모셨던 삼계서원이 철폐되며,
그 신의를 모실 곳을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며,
석천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과 2칸 반, 1칸의 건물이 서로 이어진 평면 구조로 한국 전통가옥의 단아한 미를 자랑하며,
석천정사는 금강산 유람을 하며 보았던 소담한 절집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 졌다고 하는 곳으로,
창살을 열면 계곡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물과 바람 등 자연의 소리에 독서를 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난간이 있는 넓은 마루는 대략 10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큰 규모로 옛날에는 학문 연마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강학 용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석천정사(石泉精舍)의 현판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송재(松齋 ) 송일중(宋一中,1632~1717)의 글씨이며,
정사(精舍)와 연결하여 2칸의 작은 건물이 잇대어 있어,
원생들의 방인 독역재(讀易齋)로 2칸의 온돌방은 기거의 기능으로 여겨 집니다.
독역재(讀易齋)의 현판이며,
주역을 읽는 집이란 의미의 독역재(讀易齋)는 후손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이 건물로 인해 석천정에서 석천정사(石泉精舍) 되었다고 합니다.
정사(精舍)의 마루 앞에는 세워둔 석물을 볼수 있어,
일종의 조명 받침대 역할을 한 돌로 이 위에 소나무잎을 뭉친 솔갑을 놓고 태우면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했었다고 합니다.
석천정사(石泉精舍)를 세운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1517-1591)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1536년 향시와 15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右贊成)을 지냈고,
아버지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1548)이 1547년 윤원형등의 소윤일당을 비난한 양재역 벽사사건(良才驛壁書事件:丁米士禍)에 연루되어,
삭주(朔州)로 귀양가 1년 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 하였습니다.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전원의 계곡 위에 석천정사를 짓고 산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으며,
권동보(權東輔)는 1564년 선친 등의 묘소를 수호할 추원재(追遠齋)와,
1588년 사림과 안동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三溪書院)을 건립 했으며,
부친에 대한 억울함과 상심으로 벼슬길 마다하고 낙향하여 부친을 추모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나라의 녹을 먹느니 산수간에 집을 짓고 마음편히 유유자적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정사(精舍)의 서편 산아래 암반에는 암각서가 보여,
석천정(石泉停)의 글씨로,
석천정사는 최초 정자로 만들어졌다가 후손에 의해 불을 넣는 방을 증축하며 석천정사(石泉精舍)가 되었다고 합니다.
뒤쪽 언덕 밑에는 석천정(石泉井)이라는 샘도 찾아볼수 있으며,
정사(精舍)의 난간에서 보이는 석천계곡의 풍경으로,
석청정사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 싸여 있고,
정자는 계곡에 면한 원래 지형을 최대로 살려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어 졌으며,
계곡 옆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마루는 완전히 개방된 형태가 아니라 판장문을 두어 필요에 따라 문을 닫아 공간을 폐쇄하기도 하고,
문을 열어 자연과 소통할 수 있게 해두어 개울가에 있는 창문을 열면 계곡의 풍경이 그대로 들어 옵니다.
정사(精舍)에서 내려와 서편에 있는 정면 3칸 측면1칸의 산수요(山水寮)로,
왼쪽의 1칸에는 부엌이 딸려 있어 정사(精舍)의 부속 건물로 여겨지며,
부속 건물의 산수요(山水寮) 현판이며,
산수요(山水寮) 옆에는 사주문이 자리해 있어,
서편으로 들어오는 출입구 입니다.
동편의 문으로 다시 나와 담장아래에 서니,
처마 아래에 수명루(水明樓)와 계산함휘(溪山含輝)의 현판이 있어,
철종때 경상도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송벽 이정신(李正臣: 1792-1858)의 글씨이며,
수명루(水明樓)는 "물맑은 행실과 덕행을 후대에 퍼트림"의 의미 이며,
계산함휘(溪山含輝)는 "시내와 산이 빛을 머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정사(精舍) 아래의 석천계곡으로 나와 봅니다.
석천계곡의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비룡 폭(飛龍 瀑), 백석 량(白石 梁) , 사자 석(寫字 石), 청하 굴(靑霞 窟), 권충정공 산수구장(權忠定公 山水舊庄),
청하 동천(靑霞 洞天), 팔자 암 (八字 巖)등 암반에 새겨진 글씨가 있다고 하는데,
가까운 곳에서 백석 량(白石 梁)의 글씨를 찾을수 있었고,
석천정사(石泉精舍)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솔바람 소리로 채워진 이곳은 학업에 정진하기 더없이 좋은 곳으로,
정사(精舍)의 마루에서 책을 읽으며 자연을 만끽하던 선비들의 모습을 그려볼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계곡을 따라 서편으로 향하면,
산책로를 따라 석천정사(石泉精舍)로 들어오는 운치있는 나무다리가 있고,
정사(精舍)를 관리하는 건물인 관리사가 "ㄱ"자 형태로 서있으며,
부엌이 있는 돌출된 부분의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올돌방을 들인 부분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특이 합니다.
우리나라 4대 길지 중 하나라고 꼽히는 명당 지역에 자리하여,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부친을 향한 효성과 학문 연마와 후학을 위한 생을 돌아 볼수 있는곳으로,
석천계곡의 아름다운 절경속에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경북 봉화의 석천정사(石泉精舍) 입니다.
석천계곡(石泉溪谷)과 함께 명승 제60호로 지정 되어있는 청암정(靑巖亭)은 아래에서 찾아 보실수 있습니다.
명승의 정자, 봉화 청암정_18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