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의 전통마을인 둔산동의 옻골마을에서,

백불고택(百弗古宅)으로도 알려져 있는 경주최씨종택(慶州崔氏 宗宅)을 찾았습니다.

 

옻골마을을 들어서면 마을 어귀에 수령 350여년의 노거수 느티나무 숲을 만나게 되어,

 

 

 

마치 울타리처럼 둘러져 있는 숲은 풍수지리상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조성한 비보(裨補) 숲으로,

옻골은 동쪽을 틔우고 서쪽은 막아야 좋다는 풍수설에 따라 서쪽에 숲을 조성하고 동쪽은 그대로 두었다고 하며,

예로부터 종가 마루에서 "금호강이 보이면 좋지 않다"하여 해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비보림(裨補林)과 마을 뒤편에 대암봉(臺巖峰ㆍ465m)이 보이고 그 앞에 자리하고 있는 큼직한 바위를 생구바우 또는 거북바위라고 하는데,

명당을 완성하는 핵심구실을 한다고 하며,

비보림 안쪽에 거북이를 위해 연못을 만든 것도 이에 연유한다고 하고,

또는 마을을 가리기 위해 둑을 쌓는 흙을 구하다 보니 연못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을 앞에는 400년된 회화나무 두그루가 서 있어,

최동집(催東集) 나무로 불리며,

최동집이 1616년 이곳에 정착할 당시 심어진 나무로 마을의 상징으로 여기는 나무로,

회화나무는 선비나무 라고도 하며 머리를 맑게하며 집에 심으면,

가문의 큰인물이나 큰학자가 나온다고하여 길상목이라 부르기도 하며,

옻골마을은 조선중기 학자 최동집(催東集)이 1616년 이곳에 정착하면서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토석 담장에는 옻골마을을 배경으로,

드라마 촬영이 있었슴을 알리는 현수막도 걸려 있고,

 

 

 

어느집 뜰에는 겨울을 보내는 하늘고추의 열매가 붉게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마을로 들어서면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40호 "최흥원(崔興遠) 정려각(旌閭閣)"이 있어,

최흥원(崔興遠)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789년(정조13년)에 내린 정려각(旌閭閣)으로,

정려(旌閭)는 임금이 충신·효자·효부에 대한 표창으로 마을에 세우도록 한 홍살문으로 "정문(旌門)"이라고도 부르며,

최흥원이 효자로 책봉된 연유는 어머니가 젖몸살을 앓자 다시는 젖을 빨지 않았으며,

31세 때 부친 병세를 살피려고 대변을 맛본 게 효자로 알려지게된 것이라 하며,

 

 

 

최흥원(崔興遠,1705~178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태초(太初) 혹은 여호(汝浩)이며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며,

일찍이 이상정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는데 1778년(정조 2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교관(參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를 거쳐 1784년(정조 8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좌익찬(左翊贊)에 올랐으며, 

어려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문연구에 열중하여 후에 "칠계(漆溪)선생"이라 일컬어 졌으며,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하여 규약을 세워 강학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하고 선공고(先公庫), 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생활 안정을 얻게 하였는데,

이것이 당시의 유명한 "부인동규(夫仁洞規)" 였으며,

사후 1789년(정조 13) 효행으로 정문을 세웠고 이듬해에 승지에 추증 되었으며 저서로 "백불암집(百弗庵集)"이 있습니다.

 

 

 

최흥원(崔興遠) 정려각은 정문이 없고 겹처마 맞배지붕의 1칸의 정려각만 있어,

정려각안에는 정조가 하사한 홍패가 걸려 있으며 공포에는 수탉의 머리가 새겨져 있으며,

1789년 정조가 실학자(實學者)인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의 효행과 학행을 기리기 위하여,

정문(旌門)을 세울 것을 명하여 1790년 건축한 정려각(旌閭閣)입니다.

 

 

 

1월에 들어선 겨울임에도 가을국화가 아직도 피어 있어,

옻골마을은 풍수적으로 “배산분황”의 형국으로 산을 등지고 있고, 하늘에 뜬구름이 있고, 뜬구름 위에 연꽃이 피어있는 형상이라고 하며,

지형이 남쪽을 제외한 3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오목하다고 옻골이라고 불리웠다는 이야기와,

주변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 옻골 또는 칠계(漆溪)라고도 불리웠다는 두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을의 맨 안쪽에 경주최씨종택(慶州崔氏 宗宅)이 자리하고 있어,

대문채의 전경이 들어오고,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大邱 屯山洞 慶州崔氏 宗宅)은,

국가지정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백불고택(百弗古宅)으로도 불리는 경주최씨종택(慶州崔氏 宗宅)은,

입향조인 최동집(催東集)의 손자 최경함(崔慶涵)이 1694년에 지은 고택으로 대구지역 가옥중 가장 오래된 고택(古宅)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양식과 생활을 볼 수 있는 곳이입니다.

 

 

 

경주최씨종택(慶州崔氏 宗宅)의 사랑채는 2개의 건물을 붙여 만든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사랑채는 큰사랑, 중사랑, 마루로 이어졌고 서쪽에 인접한 3칸의 행랑채를 툇마루로 연결 했는데,

큰사랑은 흥선대원군이 1871년에 내린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어낸 동천서원에서 나온 재목을 사용해 중건한 것으로 홑처마의 맞배지붕 입니다.

 

 

 

백불고택(百弗古宅) 현판으로,
현판 글씨는 후손 최병찬(崔秉瓚)의 글씨라 합니다.

 

 

 

마루 안쪽에는 수구당(數咎堂)의 현판이 있어,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이 초호를 ‘"구암(數咎庵)"으로 짓고,

사랑채에 수구당(數咎堂)의 현판을 걸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라 하며,

 

 

 

사랑채 전면의 초석은 잘다듬은 화강암에 원주를 올렸으며,

 

 

 

사랑마루의 한켠에는 용도를 알수없는 작은 항아리가 들어 옵니다.

 

 

 

사랑채의 동편뒤에는 사당과 보본당으로 갈수 있으며,

안채로 들어가는 협문이 보이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사랑채의 서편에 있어,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고 일부만 보이며,

 

 

 

정침은 1694년(숙종20)에 지은것으로 “ㄷ”자형의 안채와,

1905년(고종42)에 지은 “ㅡ”자형 사랑채로 이루어져 대구지역 민가에서는 잘 보이지 않은 “ㅁ”자형 평면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붕을 보면 "ㄷ"자 형의 안채의 내림마루 지붕이 좌우 익랑채 용마루지붕과 연결되어 우리 한옥 지붕의 미(美)를 새삼 느낄수 있습니다.

 

 

 

안채의 마루 위에서 볼수있는 대들보와 지붕을 이루는 서까래 등에서,

간결하지만 잘지어진 고택(古宅)임을 알수있게 하고,

 

 

 

안채의 대청마루에서 보이는 숭조애손(崇祖愛孫)의 편액으로,

일제강점기 영남일원의 대표적 서화가로 명성을 떨친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1862~1935)의 글씨라고 합니다.

 

 

 

안채를 나와 동편 뒷쪽에 자리하고 있는 사당으로 향합니다.

 

 

 

경주최씨종택(慶州崔氏 宗宅)에서는 특이하게 대묘(大廟)와 별묘(別廟) 2개의 사당을 별도로 두어,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인 대묘(大廟)는 1711년에 세워져 가묘로 이용되고 있는데,

 1737년에 지어진 입향조인 대암(臺巖) 최동집(催東集)을 모신 별묘(別廟)와 함께 종가의 동쪽 뒤편에 담장을 별도로 일곽을 이루며 나란이 서있습니다.

 

 

 

사당을 돌아보고 정침의 동편에 있는 보본당(報本堂)을 찾습니다.

 

 

 

보본당(報本堂)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이,

입향조이자 5대조이신 대암(臺巖) 최동집최동집(催東集))의 제사를 위하여 1742년(영조18)에 지은 재실용도의 건물로,

 

 

 

보본당(報本堂)의 현판이며,

 

 

 

보본당(報本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4면의 추녀에는 활주를 세워 두었고,

바깥 양쪽으로 1칸반의 방을 들이고 방앞에 전면에 반칸의 마루를 내어 두었으며,

가운데 6칸의 너른 마루를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보본당(報本堂)의 마루에는 몇개의 편액이 있어,

 

 

 

보본당기(報本堂記)의 기문(記文) 편액을 볼수 있으며,

 

 

 

보본당(報本堂)은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실학자 최흥원(崔興遠)이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최초로 교정한 곳으로 알려져 있어,

1770년 (영조 46) 반계수록(磻溪隧錄)을 간행하라는 왕명에 따라 조정대신들이 최흥원을 교정과 간행의 적임자로 천거하게 되어,

경상감사 이미(李彌)의 의뢰를 받은 최흥원(崔興遠,1705~1786)이 66세에 보본당에서 교정한 사실이 역중일기(歷中日記)에 실려 있습니다.

 

 

 

반계수록(磻溪隧錄) 조선 중기의 학자 유형원(柳馨遠)이 통치 제도에 관한 개혁안을 중심으로 저술한 책으로,

반계(磻溪)는 저자인 유형원(柳馨遠)의 호이며 수록(隧錄)은 책을 읽다가 수시로 베껴 둔 것이라는 뜻이나 이는 저자의 겸사이고 체계가 정연한 저술로,

유형원(柳馨遠)이 관직의 생활을 단념하고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칩거해 52세까지 22년간에 걸쳐 연구한 총26권의 방대한 책으로,

지주전호제를 혁파하고 공전제를 시행할 것 등 17세기 중·후반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고 있습니다.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은 학문적으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남야(南野) 박송경(朴遜慶)과 더불어,

영남삼노(嶺南三老)로 추앙되면서 영남의 유림사회를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었으며,

또한 그는 단순히 성리학의 이기설理氣說)에만 매달려 있던 학자가 아니라 경제지사(經濟之士)로 평가되는 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옻골마을은 경주최씨 광정공파 후손들이 모여사는 동성촌락(同姓村落)으로 지금은 약 20여 호의 조선시대 고가들이 어우러져 있으며,

백불암파(百弗庵派) 가문은 경주최씨 광정공파(匡靖公派)로 조선 후기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종가를 비롯한 다양한 용도의 건물들이 별도의 구역을 가지고 종택이라는 한 공간 안에 존재 하면서,

멸실되지 않고 각 고유의 공간을 유지한 채 현존하는 희귀한 예를 갖고 있는 가옥으로,

가묘와 별묘, 보본당으로 이어지는 조상과 관련된 공간은 양의 상징적인 의미인 동쪽에 배치하고,

이에 비해 생활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음의 상징인 서쪽에 배치하고 있어 풍수지리 및 음양호행사상을 반영한 종택(宗宅)인,

대구 옻골마을의 백불고택(百弗古宅)으로 불리는 경주최씨종택(慶州崔氏 宗宅) 방문기 입니다.



경주최씨종택의 별채인 동계정(東溪亭) 정자는 아래에서 별도로 찾을수 있습니다.

대구 옻골마을, 동계정(東溪亭)_1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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