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홍주읍성(洪州邑城)내 위치한 "홍주성역사관(洪州城歷史館)"을 찾았습니다.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 있는 곳으로,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현재의 성은 조선 문종 1년(1451년)에 수축한 것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과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여하정이 남아있고,

서쪽에 경의문(景義門), 북쪽에 망화문(望華門)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소실 되었으며 지금은 정비가 잘되어 있어 다녀 올만한 곳으로,

 

 

 


홍주성역사관(洪州城歷史館)은 홍주읍성(洪州邑城)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1년 개관 하였습니다.

 

 

 

홍주성역사관(洪州城歷史館)은 지상 1층, 지하 2층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의 로비로 들어서면 전시관은 지하에 마련되어 있어,

 

 

 

전시실에는 1871년 규장각 지도를 참고해서 만든 홍주성 복원모형도를 비롯하여, 

홍성군 출신인 최영, 성삼문, 김복한, 이설, 한용운, 김좌진 등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며,

홍성과 충남 내포지역의 특색있는 역사와 문화, 관련 유적 및 유물을 소재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전시실을 들어서면 가장먼저 들어오는 홍성의 옛이름인 홍주성(洪州城)을 복원해둔 모형도로,

1871년의 규장각 지도를 참고로 해서 옛 홍주성(洪州城)을 제작 했다고 합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된 "무안 박씨(務安朴氏) 요여(腰輿)"로,

1871년(고종8)에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있는 노은서원(魯恩書院)이 훼철되면서 성삼문의 신주를 모실 곳이 없어지자,

성삼문의 제사를 모시고 있던 무안박씨 집안의 박진하(朴鎭廈)가 예조의 승인을 얻어 노성 당호재에 옮겨 오면서 사용한 요여(腰輿)가 전시되어 있고,

 

 

 

"전세진(田世鎭) 만인산(萬人傘)"으로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세기 말의 전형적인 만인산으로 송덕산 이라고도 부르며,

1887년(고종 24)부터 1889년(고종 26) 사이에 교동부사 겸 교동진병마첨절제사 경기수군 우방어사 진무우해방장으로 강화부에 근무하다가,

다음 부임지로 떠날 때 받은 것으로 보이는 만인산(萬人傘)으로 지역의 백성 100명의 이름을 수놓아 헌정한 것이며,

수령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는 송덕비(頌德碑)나 선정비(善政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같은 비석 외에,

떠나가는 수령을 칭송하는 수단의 하나로 19세기 후반에는 임기를 마치는 수령에게,

재임 중 공덕과 백성의 이름을 양산에 수놓아 전하는 풍습으로 만인산(萬人傘) 있으며 양산 대신 병풍에 새기면 만인병 이라고 합니다.

 

 

 

전시실에는 홍성지역 출토의 토기를 비롯한 다양한 도기들이 진열되어 있고,

 

 

 

글씨가 새겨진 기와와 다양한 문양의 암막새와 수막새 등의 기와 유물들도 볼수 있으며,

 

 

 

전운상영정(田雲祥影幀)과 교지(敎旨)로,

전운상영정(田雲祥影幀)은 조선 후기의 무신인 전운상(田雲祥,1694∼1760)의 초상화로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 되었으며,

화원 김희겸이 영조 16년(1740)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며,

"가선대부 경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1754년에 내린 교지(敎旨)이며,

전운상은 1717년 24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함경도 부사로 있을 때 어진 정치를 베풀어 왕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홍성의 수호신이 된 홍주목사 홍가신을 신격화 하여 만든 목상으로,

만전(晩全) 홍가신(洪可臣,1541~1615)은 임진왜란 말기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평정 하였는데,

1596년(선조 29) 이몽학은 부여에서 동갑계를 사주하고 굶주린 농민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켜 홍산 관아를 습격하고 수천의 무리를 이루어,

임천과 정산, 청양, 대흥군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홍주성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 하려고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당시 홍주목사 홍가신은 민병을 규합해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였고 장수 박명현(朴名賢), 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고,

1등 공신이 되었으며 그후에도 주민들이 학질등의 전염병으로 고통을 당할때마다,

특유의 지혜와 노력으로 극복하여 주민들은 홍가신(洪可臣)을 신처럼 받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득의 초상(林得義 肖像)과 증직교지(贈職敎旨)로,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임득의 초상(林得義 肖像)"으로,

1604년(선조 37) 임득의가 청난공신에 책록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왕명으로 그렸던 공신상으로 추정되며,

임득의(林得義, 1558-1612)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자방(子房)이고 본관은 평택이며,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1604년(선조 37) 청난공신(淸難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충청수우후(忠淸水虞侯)와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역임 하였습니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17세기 이후 발전한 기호 지역의 성리학 기호유학(畿湖儒學)의 전시물로,

기호유학은 이이(李珥), 성혼(成渾), 조헌(趙憲) 등 경기 지역의 유학자들에 의해 성립되어,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충청 지역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한 유학으로,

 

 

 

기호유학 거목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유품 등으로,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1682~1751)은 기호학파인 우암 송시열과 수암 권성하의 학통을 이어 정통 주자학을 계승했으며,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으로 호락논쟁에서 "호론"을 이끈 대유학자이며,

남당(南塘)의 사상은 한말 위정척사 운동에 사상적 근간을 이뤘으며,

지산 김복한, 복암 이설 등의 의병장과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 등 항일 위인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입니다.

 

 

 

상설 전시관의 다음 전시실로 가는 복도 옆에는,

 

 

 

사형의 하나로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얼어죽는 원시장"을 볼수있어,

홍성에는 어느지역보다 이존창 등에 의해 천주교가 일찍 전파되어 많은 교우들이 있던 곳으로 전시관에는 얼어죽는 "원시장"을 재현해 두었는데,

기록상 123명이나 되는 순교자가 있으며 동문인 조양문으로 끌려온 교우들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거나 옥에서 굶어죽기도 했고,

그 외에도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한꺼번에 구덩이에 묻혔다고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실은 홍성지역의 근대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조선만세(朝鮮萬歲)"와 "독립염원(獨立念願)" 이라고 쓰여 있는 일제강점기 때의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으며,

 

 

 

근대기의 우리나라 지도와 홍성지역의 문서와 자료들을 전시해 두었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홍성의병(洪城義兵)을 알리는 전시물으로,

제1차 홍주의병은 1895년 10월 8일 왕후 민씨가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홍성의 기호유림 거두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 안병찬(安炳瓚) 등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홍주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실패 하였고,

제2차 홍주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이 시기의 의병을 을사의병이라 하며,

전국에서 일어난 을사의병 규모가 가장 크고 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던 곳이 호서지방의 중심인 홍주로,

민종식(閔宗植,1861년~1917)은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봉기하여 5월 13일 홍산을 떠난 의병부대는 남하하여 서천읍을 점령하고,

다음날 북상하여 비인과 남포읍성  점령하여 의병은1천 여 명으로 불어나 5월 19일 홍주성 점령에 성공 하였고,

홍주성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채광묵 등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들이 의병을 모아 차례로 입성하여,

홍주성 점령 직후 전성기의 홍주의병은 총포로 무장한 의병 600명, 창의 가진 의병 300명, 유회군(양반 유생들과 구성된 부대) 300명등,

모두 1천 200여명에 달하였으나 1906년 5월 31일 일본군에 의해 패하여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홍성의 근대교육에 관한 자료들로,

1907년의 공립학교인 홍주공립 보통학교를 시작으로 8개의 사립학교인 팔영학교 등에 관한 내용들을 볼수 있고,

 

 

 

해방이후의 근대기 홍성의 여러가지 자료들도 전시해 두었습니다.

 

 

 

전시실을 나오는 곳에는,

홍주성에 관한 역사적 이야기를 홍성 출신의 소리꾼 "장사익"옹이 화면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홍주성역사관(洪州城歷史館)은 홍주읍성 내에 위치하고 있고,

읍성 주변에는 옛 홍주목과 관련한 여러 건축물 등이 남아 있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나들이 등에서 역사관 전시와 연계하여 함께 찾아 볼만하며,

산책삼아 읍성을 거닐며 충남 홍성의 역사를 살펴 볼만한 곳이기도 합니다.

 

홍주읍성(洪州邑城)에 대한 내용은 아래에 별도로 올려 두었으니,

아래를 누르시면 확인 하실수 있습니다.

홍성여행, 홍주읍성(洪州邑城)_1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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