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으로,

홍성의 홍주읍성(洪州邑城)을 찾았습니다.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복원과 남아있는 건물 등의 정비가 잘되어 있어 찾아 볼만한 곳으로,

 

 

 

홍주읍성(洪州邑城)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으로 1870년(고종 7) 목사 한응필(韓應弼)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門樓)로,

1906년의 항일의병운동 때 치열했던 격전으로 문루가 심하게 훼손 되었고,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하려 하였으나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되었으며,

1975년에 완전 해체하고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홍주읍성의 문은 당시에 남문이 없었고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서문인 경의문(景義門), 북문인 망화문(望華門) 있었다고 합니다.

 

 

 

홍주읍성(洪州邑城)을 돌아 보면서 안내문에 있는 지도로 찾아 보아야 할곳을 미리 보아 둡니다.

 

 

 

홍주읍성(洪州邑城)의 옛 지도로,

옛 지도를 통하여 옛 홍주읍성의 규모나 위치를 지금의 안내도와 비교하여 참고로 살펴 보는것도 도움이 될듯 합니다.

 

 

 

홍주읍성(洪州邑城) 내에있는 주차장에서 남문인 홍화문으로 가는 길목에 만나게되는 비석군으로,

본래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 밖과 금마총 주변에 있던 비석군을 홍주성 안으로 옮겨 둔 것으로,

 

 

 

비석군 중에는 조선 중. 후기에 홍주목사를 지낸 5명의 홍주목사 선정비도 포함되어 있어,

그 가운데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정약용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의(柳誼,1734∼? )가 홍주목사로 있을 때,

그의 검소함과 청렴결백함을 홍주 백성들이 모두 칭송했다고 합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6호인 "홍주성 수성비(洪州城 修城碑)"도 함께있어,

홍주성을 고쳐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비문에는 순조 24년(1824) 진장(鎭將) 김계묵(金啓默)과 홍주목사 이헌규(李憲圭)가 이 성을 돌아보고,

성이 황폐해진 모습에 탄식하여 수리하게 되었다는 내용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석군의 건너편에는 홍주정(洪州亭)의 현판이 있는 육각정자가 있어 쉼터로 제공되고 있고,

 

 

 

홍주읍성(洪州邑城)의 남문인 홍화문(洪化門)으로,

 

 

 

조선말기의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으로 남아 있었으나,

옛지도와 발굴을 통해 2013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홍화문(洪化門)으로 복원했다고 하며,

 

 

 

남문인 홍화문(洪化門)의 누마루로 올라 봅니다.

 

 

 

누마루에 오르니 들어왔던 홍주읍성(洪州邑城)의 내부쪽의 전경으로,

홍주(洪州)가  지명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라고 하며,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던 고려의 공민왕 때 왕사(王師)인 보우 대사(普雨大師)가 배출된 곳이라 하여 목으로 승격되었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홍주(洪州)와 결성(結城)을 합치는 과정에서 두 지명의 한 글자씩을 따서 홍성(洪城)이 되었습니다.

 

 

 

충남 홍주(洪州)는  "넓은 고을"이란 뜻으로  "홍주" 호서지방의 큰 읍였으며,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백성이 번창하고 많아서 다스리기 힘든 고을로 여겨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홍주(洪州)는 홍성(洪城)의 옛 이름으로,

조선초기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새로운 규식(規式)에 맞추어,

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으며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km),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 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하며,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둘레는 약 800m이며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성 안의 홍주아문(洪州衙門), 그리고 주변의 산성(山城)을 포함하며,

백제시대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처음 축조된 연대가 확실하지 않고 고려시대에 고쳐 쌓았다는 기록도 전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둘레가 533보 2척이고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고 하였고,

 

 

 

그 뒤 현종(顯宗, 재위 1659∼1674)때 한계수(韓桂洙)가 다시 수리하였고,

1824년(순조 24)에는 진장(鎭將) 김계묵(金啓默)과 홍주목사 이헌규(李憲圭)가 수리 하였으며,

1870년(고종 7)에는 홍주목사 한응필(韓應弼)이 조양문·경의문(景義門)·망화문(望華門) 등 3곳의 성문과 함께 관영(官營)을 지었으며,

 

 

 

홍성은 1895년과 1906년 말 충청남도 홍성 일대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항일 투쟁의 홍성의병(洪城義兵)이 일어난 곳으로,

제1차 홍주의병은 1895년 10월 8일 왕후 민씨가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홍성의 기호유림 거두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 안병찬(安炳瓚) 등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홍주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실패 하였고,

 

 

 

제1차 홍주의병은 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이 시기의 의병을 을사의병이라 하며,

전국에서 일어난 을사의병 규모가 가장 크고 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던 곳이 호서지방의 중심인 홍주로,

민종식(閔宗植,1861년~1917)은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봉기하여 5월 13일 홍산을 떠난 의병부대는 남하하여 서천읍을 점령하고,

다음날 북상하여 비인과 남포읍성  점령하여 의병은1천 여 명으로 불어나 5월 19일 홍주성 점령에 성공 하였고,

홍주성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채광묵 등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들이 의병을 모아 차례로 입성하여,

홍주성 점령 직후 전성기의 홍주의병은 총포로 무장한 의병 600명, 창의 가진 의병 300명, 유회군(양반 유생들과 구성된 부대) 300명등,

모두 1천 200여명에 달하였으나 1906년 5월 31일 일본군에 의해 패하여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홍주읍성(洪州邑城)을 따라 거닐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의병을 일으켰던,

홍성지역의 유림과 백성들의 충절을 되새겨 봅니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내려오니 옛 우물이 있어 물맛이 좋은지 물을 떠가는 분이 계시고,

홍주읍성 내 3개의 우물 중 하나로 추정되는 이 우물은 2005년 홍성지원과 홍성지청이 월산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식수 등으로 사용 했으며,

012년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을 조성하면서 외형을 보수 하였으며,

주옥(감옥) 바로 옆에 있는 우물로 충청도 첫 순교자인 원시장 "베드로"를 동사(凍死)시키는데 사용된 우물 이기도 합니다.

 

 

 

우물 옆에는 1872년 홍주지도를 통해 복원된 홍주읍성 옥(獄)이 자리해 있어,

입구 앞에는 홍주감옥의 순교터 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고,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있는 홍주옥으로,

1913년 홍주재판소와 검사국이 이전하면서 훼철된 뒤에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2012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이 되었습니다.

 

 

 

3칸으로 되어있는 감옥을 들여다 보니 1칸은 감옥을 지키는 집무실 또는 취조실로 보이고,

 

 

 

이곳은 천주교 박해 동안 홍주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을 갖은 형별을 집행하던 시설로,

홍주옥은 충청도의 첫 순교터이며 기록상 전국에서 공주 다음으로 많은 113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이라 하며,

충청도의 첫 순교자인 복자 원시장 베드로가 1793년 이곳에서 혹독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인근 우물물을 이용해 얼려 죽이는 형벌을 받았고,

외에도 굶주림과 목마름, 교수형과 장살형, 질병 등으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곳입니다.

 

 

 

또다른 한칸은 일제 강점기 애국지사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문초하는 장면들을 벽에 사진으로 두어,

일제 강점기 이곳에서 애국지사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이 자행 되었슴을 알수 있습니다.

 

 

 

천주교의 기록에 의하면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이 홍주에 복음을 전한 후,

박해 초기(1792)부터 1866년(고종 3)에서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병인박해까지,

약 80년 동안 많은 신자들이 끌려와 조양문(동문)에서 교수, 참수형을 받거나 옥에서 굶어 죽었다고 하며, 

기록상 212명의 순교자가 있고 무명 순교자까지 거의 700여명이 순교 하였다고 하며,

홍주옥을 비롯한 홍주읍성 주변의 순교지는 천주교의 성지중 하나라고 합니다.

 

 

 

홍주옥에서 나와 홍주아문으로 가는 길에는,

물은 말라 있지만 장방형의 연지를 조성해 두었고,

 

 

 

수령 300여년에 달하는 느티나무가 있는 홍주아문(洪州衙門)은 역대 홍주목사가 행정을 하던 안회당(安懷堂) 외문으로,

1870년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이 성의 동문인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세운 것이며,

 우리 나라 아문 중에서도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고 군청 정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적 제 2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홍주아문(洪州衙門)의 현판으로,

현판의 원래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것이었으나 대원군이 사액한 홍주아문의 글씨는 6.25 전후해서 망실 되었고,

현존하는 홍주아문 글씨는 광천에 살았던 중국인 또는 지역 서예가였던 김순동(1898~1972) 전 충남대 교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주아문(洪州衙門) 안에는 열간 반의 규모인 내삼문과 남과 북으로 행랑을 이어서 지어 담장을 대신했던 큰 건물이 있었는데,

3·1 운동 당시 홍성의 만세사건을 진압시키기 위해 진주한 일본군이 홍성군청을 병영으로 삼고 군수를 추방하는 한편 내삼문을 헐어 버렸고,

그 이후 행랑은 보수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져 버렸고 오직 외삼문인 홍주아문만 보존된 것이라 합니다. 

 

 

 

홍주아문(洪州衙門)과 더불어 사적 제213호인 "안회당(安懷堂)"은,

홍주목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헌으로 오량으로 된 22칸의 목조와가이며,

고종7년(1870) 4월에 상량하여 전 주민의 정성과 정교한 기술로 완성한 관서로서,

동헌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곳으로,

 

 

 

건물 옆에는 "홍주 동헌 안회당(安懷堂)"의 표지석이 있고,

 

 

 

안회당(安懷堂)의 현판은 원래 대원군이 하사 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안회(安懷)"란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며,

 

 

 

안회당(安懷堂)은 동헌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보아왔던 동헌과는 그 형태와 구조가 전혀 다른데,

동헌과 달리 위엄이 있어 보이는 높은 지붕에 넓은 대청이 보이지 않고 부유한 사대부가의 사랑채 정도로 꾸며져 있어,

안회당이 처음부터 동헌은 아니었다고 하며 안회당 뒤편의 서남쪽에 "근민당"이라는 동헌이 별도로 있었다고 하며, 

원래의 동헌 였던 근민당(近民堂)은 천주교 박해를 한 동헌으로 유명하며,

근민당이 어떻게 해서 유실되고 대신 안회당이 동헌이 되었는가는 정확지가 않은데,

안회당은 1977년 해체 복원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조 숙종 4년인 1678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그 이전에는 근민당이 동헌 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안회당과 취은루는 사료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문이 닫혀있어 내부는 들여다 볼수 없고,

 

 

 

"ㄱ"자 형으로 된 안회당(安懷堂)은 한편에 장초석을 주추로 쓴 누마루 방이 있어 누각의 형태로 꾸몄는데,

정면 4칸에 측면 2칸으로 되어있으며 건물을 바라보고 좌측 끝에는 꺾이어 나온 누마루 방이 달려있어,

누마루 방은 모두 4칸의 마루방으로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정자처럼 꾸몄고 날렵하게 위로 솟은 처마는 한옥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마루 방 뒤편에 있는 2개의 방앞에는 개방마루를 놓아 뒤편에 있는 여하정과 뒷뜰 등을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안회당의 뒤편에는 연도를 내어놓고 높이 솟은 굴뚝을 올려 위엄을 보이고 있습니다.

 

 

 

안회당 뒷뜰에는 여하정(余何亭)이 있어,

여하정(余何亭)은 고종 33년(1896)에 이승우 목사가 신축한 수상정으로 목조와 즙의 육각형 정자로, 

옛 연못을 연련하여 누운 고목과 수면을 장식한 연꽃은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곳으로,

 

 

 

육각정자인 여하정(余何亭) 앞에는,

수령 300년을 넘긴 노거수 왕버들이 장방형의 연못을 넘을듯 누워있어 빼어난 풍취를 보여주고 있으며,

 

 

 

정자의 규모는 3평 5합 5작의 작은 규모로 1896년 (고종 33) 이승우 목사가 옛 청수정 자리에 세운 것이라 하며,

아담한 규모의 정자 이지만 고목과 연못의 연꽃들의 정취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하는 곳으로,

 

 

 

홍주읍성(洪州邑城)을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만난 여하정(余何亭)은,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여행자들 에게는 쉼터이며 안식처로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어,

홍주읍성으로의 여행에서 대미를 장식해주는 아름다운 정취가 있는곳 입니다.

 

 

 

충청남도 홍성을 여행하면서 찾은곳으로,

천주교 박해와 홍주의병의 구국의 항쟁을 되돌아 볼수 있고,

홍주아문(洪州衙門)을 비롯하여 안회당(安懷堂)과 빼어난 정취의 여하정(余何亭) 등의 유적이 있으며,

깔끔하게 정비하고 정리가 되어있어 홍성을 여행 하시면 찾아 볼만한 곳으로,

충남 홍성의 홍주읍성(洪州邑城) 방문기 입니다.

 

홍주읍성(洪州邑城) 내에는 "홍주성역사관(洪州城歷史館)"이 있어 함께 찾아 볼만한 곳으로,

역사관에 대한 내용은 아래에서 확인 하실수 있습니다.

홍성, 홍주성 역사관(洪州城 歷史館)_1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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