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있는,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韓山李氏陰崖公派古宅)"을 찾았습니다.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龍仁韓山李氏陰崖公派古宅)은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택(古宅) 앞에는 "문의공(文懿公) 이자선생(李仔先生) 문학비(文學碑)"와 한산이씨(韓山李氏)의 계보를 보여주는 비석 등이 있고, 

시비에는 음애(陰崖)이자(李仔)의 시(詩) 추월(秋月)이 있어,

秋月十分好(추월십분호)   가을 이 무척 좋아서

淸光此夜寄(청광차야기)   맑은 빛의 이 밤이 기이하네

映江波動盪(영강파동탕)   강에 비추어 물결이 움직이고

臨峀影參蚩(임수영참치)   메 부리에 닿으니 그림자가 들쑥날쑥하네

髮白知無忝(발백지무첨)   터럭이 히니 더럽힘이 없음을 알겠고

心眞要不斯(심진용불사)   마음이 참되려면 속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네

旅魂老易感(여혼노이감)   나그네의 넋은  늙을수록 느끼기 쉬우니

吟簫自多時(음소자다시)   시 읊고 휘파람 부는 것이 스스로 많을 때이네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韓山李氏陰崖公派古宅)의 입구는 사주문으로 되어 있어,

원래의 대문이 아닌 후대에 와서 변형된 모습으로 여겨지며,

 

 

 

고택으로 들어가면서 건물의 배치도로 방들의 위치를 미리보아 둡니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된 "ㄷ"자형의 본채가 있어,

원래는 앞쪽에 "一"자형의 행랑채가 있어 트인 "ㅁ"자 형태 였던 것으로 보이나 행랑채는 소실되고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어,

조선 중종 때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음애(陰崖) 이자(李仔, 1480∼1533)가 살았던 곳으로 전하는 고택(古宅)으로,

 

 

 

본채의 좌측 날개 부분으로 건넌방과 뒷면에 툇마루가 있는 사랑방이 있는 곳이며,

 

 

 

마당 한쪽에 우물을 두고,

중앙에는 3칸 대청과 툇마루가 딸린 1칸의 건넌방과 부엌이 있고,

 

 

 

오른편에는 2칸의 안방과 1칸 반씩의 부엌이 있으며 이어서 나뭇간이 자리해 있으며,

본채는 민도리집으로 좌우 날개 부분의 지붕 형태가 서로 달라서 좌측의 사랑방 부분은 팔작지붕의 형태이며,

우측 나뭇간 부분은 맞배지붕인데 박공면과 보의 일부에 불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뭇간 옆으로 행랑채 등이 인접해 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3칸의 대청마루에서 청방(廳房)과 건넌방이 있는 쪽의 모습으로,

 

 

 

건넌방 앞에는 쪽마루를 한단 더높게 올려 두었으며,

고택(古宅)은 근자에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는지 옛 목재와 새로운 목재가 함께 구성된 모습을 곳곳에서 볼수 있습니다.

 

 

 

대청마루 안쪽에는 금서재(琴書齋)의 현판이 걸려 있고,

 

 

 

고택(古宅)에는 방이 여러개 있어,

대청 서편에 있는 건넌방부터 들여다 보면,

 

 

 

건넌방은 2개의 작은방으로 되어 있고 문을 두어 통할수 있으며,

 

 

 

문은 넌출문인 분합문(分閤門)으로,

필요시에는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되어있어 하나의 방으로 쓸수있게 해두었고,

 

 

 

넌방을 지나면 마루방인 청방(廳房)이 있어,

고택의 북서쪽에 자리한 청방은 사당(祠堂)을 따로 짓지 않고 건물의 일부를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이 곳에만 간단한 가칠단청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건물의 왼편에 배치되어 있는 2칸의 사랑방으로,

 

 

 

사랑방에는 특이하게 벽장과 다락이 있어,

 

 

 

벽쪽의 큰문을 열면 마루바닥의 다락이 있고,

 

 

 

옆의 작은 문을 열어보면 작은 벽장이 자리해 있습니다.

 

 

 

다시 대청마루로 되돌아와 동편에는 안방이 있어,

 

 

 

2칸의 안방도 사랑방과 거의 유사한 모습이며,

창은 겨울의 찬바람을 막기 위해 미닫이와 여닫이의 2중으로 해두어 조선후기에 와서 변한듯 여겨지며,

 

 

 

안방 옆에 있는 부엌을 들여다 봅니다.

 

 

 

건넌방 앞쪽에도 부엌으로 보이는 문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 작은 부엌이 있어,

건넌방과 사랑방 사이에 배치가 되어 있어 특이하며,

 

 

 

본채의 좌측 날개 부분은 사랑으로 건넌방 부엌에 연접하여 1칸 반의 청방(廳房)과,

전면에 툇마루가 딸린 2칸 사랑방, 1칸 반의 부엌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 이러한 구조는 조선 후기 경기도 지역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을 구분하고 있어,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택(古宅)은 여러 차례의 중수로 음애(陰厓) 이자(李仔) 생전의 가옥형태가 아닌 조선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택(古宅)의 주인 음애(陰厓) 이자(李仔,1480∼1533)는,

본관(本貫)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厓)이며 고려말 대석학(大碩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5대손으로,

1501년(연산 7년 辛酉) 진사가 되었고 1504년(연산 10년 甲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1506년(中宗 1) 중종 반정 이후 발탁되어 홍문관수찬이 되었고 1517년(中宗12년 丁丑)에 우승지가 되었으며,

이어 한성판윤(漢城判尹)과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으며,

이 무렵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신진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고,

1518년(中宗13)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 되었는데,

이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된것을 지성으로 간호하여 회복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명나라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吏曺佐郞)에 승진 하였으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士林派)가 참화를 입게 되자,

그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 되었으며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이연경(李延慶)·김세필(金世弼)·이약빙(李若氷)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습니다.

시문인 음애집(陰崖集)이 전하고 있으며 시호(諡號)는 문의((文懿)입니다.

 

 

 

고택(古宅) 서편에 있는 사랑방 앞으로 가보면,

방앞에는 마루가 놓여 있고 정면의 기둥을 방주(方柱)의 네 모서리를 깍아내어 팔각기둥으로 세워두어 특이하며,

 

 

 

사랑방의 다락에 있는 창의 모습으로,

옆으로 접어서 모두 열어 둘수있는 분합문의 형태로 되어 있어 눈길이 가며,

 

 

 

고택의 뒤편으로 가보니 온돌방의 굴뚝들은 모두 뒤편에 내어 두었는데,

높지는 않으나 기와로 쌓아올린 굴뚝이 정겹습니다.

 

 

 

고택 뒤편에는 협문이 있어 들어가면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사당이 있어,

 

 

 

사당에는 효문의공(孝文懿公) 부조지묘(不祧之廟)의 현판이 걸려 있어,

"효문(孝文)"의 시호를 받은 불천위(不遷位)를 모신 사당임을 짐작 할수 있는데,

 

 

 

"부조지묘(不祧之廟)"는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신주를 모신 사당 입니다.

 

 

 

조선중기에 세운 고택(古宅)이나 조선후기의 양식을 많이 볼수 있으며,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전형적인 중류주택 모습을 볼수 있는곳으로,

음애(陰厓) 이자(李仔)의 고택인 경기도 용인의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韓山李氏陰崖公派古宅)" 입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이자 동방사현(東方四賢)중의 한 사람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음애(陰崖)이자(李仔)와 관련한 유적으로 용인 사은정에 관한 내용은 아래에서 확인할수 있습니다.

조광조(趙光祖)의 정자, 용인 사은정(四隱亭)_19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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