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 있는 고택으로,

"성성재 종택(惺惺齋 宗宅)" 입니다.

 

"안동 성성재 종택(安東 惺惺齋 宗宅)"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9호로 지정 되었으며,

비교적 외딴곳에 자리해 있지만,

이곳은 고택의 모두를 개방해 두어 돌아보기에 좋은 곳으로,

 

 

 

 

성성재 종택(惺惺齋 宗宅)은 조선 중기 학자인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의 종택으로,

금난수(琴蘭秀)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字)는 문원(聞遠)으로 퇴계의 제자이며,

월천(月川) 조목(趙穆)과는 처남 매부지간으로,

12세에 청계(靑溪) 김진(金璡,1500~1580)에게 글을 배우고 그 후 퇴계 선생의 문화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25세 때 현 종택 아래에 있는 동계(東溪)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학문에 힘썼는데,

퇴계가 친필로 성재라는 현판을 내려주면서 면려(勉勵)하였고,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팔영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성성재 종택은 정침과 아래채 및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 반 규모의 "ㅁ"자 형이며,

사랑채는 중문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사랑과 큰사랑이 있는데

큰사랑은 2통칸 방과 마루, 책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은사랑은 1칸 반의 방과 반칸의 마루가 연접되어 있고,

전면에 퇴를 둘렸습니다.

 

 

 

 

종택(宗宅)의 주인인 금난수(琴蘭秀,1530∼1604)는,

1561년(명종 1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에는 제릉참봉(齊陵參奉)이 되었고 이어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역임 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 봉양을 위하여 향리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6년(선조 29)에 성주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599년(선조 32) 봉화현감을 하루 만에 사임하고 귀가 하였고,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예안(禮安)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배향 되었습니다.

 

참고로 안동시 도산면에는,

성성재 금난수가 세운 빼어난 정자인 고산정(孤山亭)이 있으니 찾아볼만 하며,

"고산정(孤山亭)"에 고나한 이야기는 아래를 클릭하시면...

학(鶴)과 함께 유유자적했던 안동의 정자, 고산정(孤山亭)_170101

 

 

 

 

 

사랑채도 개방되어 있어 벽장이 있는 온돌방도 들여다 보고,

 

 

 

 

안채와 연이어 있는 사랑채의 동편으로,

촉대가 있는 사당과 인접해 있는데,

사람이 거주하고 있지 않고 외딴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고택임에도,

관리가 잘되어 있고 전반적으로 깔끔합니다.

 

 

 

 

사랑채의 서편에는 초가지붕의 건물이 있어,

 

 

 

 

종택의 아랫채는 5칸으로 고방으로 사용한듯 하며,

초가지붕을 이고 있어 정겨운 느낌이 듭니다.

 

 

 

 

큰사랑채과 작은사랑 사이에는 중문이 있어,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 6칸, 측면 6칸 반의,

"ㅁ"자형의 맞배지붕을 하고 연이어 있는 안채가 있어,

 

 

 

 

안채는 2통칸의 안방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부엌이 우측에는 대청이 있고,

대청 우측칸 전면에 상방이 있고,

안방 윗부분을 환기와 채광이 좋은 통다락으로 구성하고 있어 특이하며,

 

 

 

 

안방과 부엌 및 고방의 상부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이나 되는 매우 큰 규모의 다락을 두었는데,

상부가 다락으로 구성된 까닭에,

안채의 층고가 매우 높아 안채는 1고주 5량가를 형성 하였으며,

 

 

 

 

익랑채와 연이어 있는 안채의 대청마루도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채의 방문앞 네모난 기둥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염주가 걸려있고,

 

 

 

 

종택(宗宅)의 널직한 부엌도 들여다 봅니다.

 

 

 

 

안채와 연이어 있는 오른쪽 익랑채이며,

 

 

 

익랑채 에서는 밖으로 나갈수 있는 작은문이 나있어,

 

 

 

 

안채의 뒤편과 옆면으로 통하게 되어 있으며,

 

 

 

 

부엌 뒤에는 겨울을 위한 장작이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사랑채의 동편인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어,

사당은 정침 오른쪽 산비탈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대를 쌓아 높게 해두었는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며,

 

 

 

 

사당의 내부를 들여다 보니 3분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는듯 하며,

 

 

 

 

종택(宗宅)의 마당에서 보면,

서편 언덕아래에 "부라원루"가 자리하고 있어,

이곳을 찾으시면 함께 돌아보시면 더욱 좋을듯 합니다.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살펴볼수 있으며,

건물의 규모에 비해 장식도 하지 않은 매우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어,

18세기 안동지방의 상류주택으로 시대성과 지역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곳으로,

경북 안동의 예안에서 만난 "성성재 종택(惺惺齋 宗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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